운수 좋은 날

안녕하세요, 모두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간만에 게시판에 들러 근황 잡담을 하나 올리고자 합니다.

어제는 햇살이 너무 따뜻하게 내려 쬐어 겨울 내내 침대에 드러누워 일어나기를 거부하던 정병 환자가 370년 만에(구체적인 숫자지만 저희 집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입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겨울 이불 빨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움직이던 참에 마침 취업 준비 중인데 쓰던 노트북이 고장 났다는 친구 이야기에 안 쓰던 저의 한성 인민 에어를 빌려주려고 약속까지 잡았더랬죠.

이 노트북으로 말하자면 2017년 임윤님께 소반 1호로 호출당했을 때 서울까지 모셔 가다가 무게에 짓눌려 압사할 뻔한 묵직한 모델입니다. 본체 2.7킬로에 벽돌 같은 어댑터 더하면 3킬로에 근접하는 무게를 자랑합니다. 장난 아니고 어제도 먼지 털어 백팩에 넣고 짊어지는데 문자 그대로 뒤로 휘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 노트북이냐 벽돌이냐 욕을 하면서 집을 나섰죠. 지금 막 번역하시는 분들, 노트북은 무게도 중요합니다. 저처럼 게임도 하겠다고 무거운 게이밍 노트북 사시는 분 없으시겠죠? 무조건 가벼운 거에 램 짱짱하게 달아서…아니 컴퓨터도 잘 모르는 주제에 고나리질은 여기까지 하겠읍니다.

하여간 스벅에서 친구를 만나 노트북 건네주고 화기애애하게 잡담까지 하던 중 에이전시에서 호떡 하나 구울 수 있냐?라고 알람이 왔습니다. 평소 제 번역 고충을 자주 들어주던 친구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현장에서 일하는 장면 구경 좀 시켜 달라고 옆구리를 찔렀고, 평소라면 거절했을 일을 친구 부탁에 수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재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임윤님이 늘 말씀하시는 ‘파일 열 줄 아는’ 번역가에서 ‘파일을 연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보통은 받은 파일이 그냥 스륵 열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현실은 파일명이 너무 길어 오류가 나거나, 서버가 문제인지 그날 스타벅스 인터넷의 문제인지 서버 접속 자체가 안 된다와 같은 다양한 상황이 겹쳐서 ‘파일을 열기’가 어렵게 됩니다. 진땀 흘리며 허둥대는 저를 보던 제 친구가 명쾌한 해결책을 내려 줍니다.

“여기서 너희 집까지 10분이잖아. 울지 말고 집에 가서 해. 난 여기서 기다려 줄게.”

친구 말에 용기를 얻어 저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집까지 전력 질주합니다. 10분 걸리는 건 맞는데 파일 제출 시간에서 삽질하느라 20분을 지체하여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거든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부리나케 번역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질문 들어갑니다. 다른 번역가 여러분들은 번역하면서 무엇이 제일 두려우세요? 오역 내는 거? 마감 놓치는 거? 돈 못 받고 떼이는 거? 앞에 나열한 상황을 저도 두려워하지만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다 해 놓은 번역이 날아가는 상황입니다. 하다못해 워드 파일에 잡소리 끄적이다 그냥 꺼도 이전 파일이 남아 있는 판에 해 놓은 번역이 날아갈 상황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정병 환자답게 번역 날아갈까 두려워 트라도스 작업하면서도 전체 저장 단축키를 거의 ctrl enter 누르는 만큼이나 강박적으로 눌러 댑니다.

다소 촉박한 시간이지만 하여간 번역 다 하고 전체 저장을 눌렀을 무렵 갑자기 트라도스에서 ‘파일 저장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더니 트라도스 자체가 꺼져 버립니다. 이건 또 뭐야 이러면서 트라도스를 열어보니 세상에 프로젝트 파일 목록에서 해당 프로젝트 자체가 안 보입니다. 잠시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남은 시간은 10분. 침착하게 문서로 들어가 프로젝트 폴더를 되짚어 봅니다. 아까 제가 지정한 폴더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정말 망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잠시 목매다는 상상을 하다가 ‘새 폴더’라는 폴더가 기적적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살포시 클릭해 보니 아까 번역해 놓은 프로젝트 폴더가 거기 들어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파일 하나를 클릭하니 프로젝트 폴더도 다시 목록에 나타나는데 빌어먹을 이제는 리턴 패키지가 생성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 요구하는 포맷은 리턴 패키지인데 리턴 패키지는 생성이 안 되고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결국 sdlxliff 파일 전체를 보내면서 피엠에게 읍소하는 장문의 메일을 씁니다. 보내 놓고도 안심이 안 되어 피엠을 절대 귀찮게 하지 말라고 배운 건 개나 줘 버리고 전화까지 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상황 설명을 합니다. 친절한 피엠은 보통 받고 나서 이메일 답장을 안 하는데 파일 잘 받았으며 다음 작업으로 또 연락하겠다고 저를 안심시켜 주네요. (……)

원래는 수영장을 갔어야 하는데 엄한 일을 받은 대가로 그날 저녁 저는 친구랑 삼겹살을 안주로 맥주를 좀 마셨고 앞으로는 절대 외부 인터넷을 믿고 엄하게 일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진짜 오라지게 운수 좋은 날이었습니다.

p.s. 까페에서 작업하시는 분들 인터넷 상황은 괜찮으신가요? 전 집 인터넷이 구린 편인데 스벅이 더 심하여 어제 결국 집까지 달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따로 핫스팟이라도 열어서 작업하시나요? 괜히 궁금해서 여쭤 봅니다.
ABC blueundine blueundine · 2023-03-21 12:43 · 조회 1151
전체 5

  • 2023-03-21 13:00

    전... 망할 외부 인터넷을 믿지 않습니다.
    노트북으로 뭔가를 해야한다면 무조건 스마트폰 핫스팟(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가능. 딱 한 번 파일 확인한다고 해봤어요;;;)으로 합니다.
    까페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는데 저는 노트북 화면만으로 하려니 너무 답답해서 못하겠더군요;;


  • 2023-03-21 17:39

    흥미롭네요. 연락 드리겠습니다.


    • 2023-03-21 17:46

      참고로 컴퓨터 모내기 기술자(개발자라는 뜻)인 귀인은 스타벅스 가서 일할 때 전용 라우터를 포함해 각종 보안이 완비된 기기를 보부상처럼 한짐 싸서 가더라고요. 데이타 새거나 날아가면 자기 목숨도 같이 날아가는 거라면서.....


  • 2023-03-21 19:01

    전 스타벅스 안 갑니다. 아시다시피 스타벅스는 와이파이를 한 번 연결해도 일정 시간마다 연결을 강제로 종료시켜서 재연결을 해야하는데 로컬 CAT툴 사용 중인 경우는 상관없지만 온라인 툴을 사용 중이면 높은 확률로 연결이 끊어집니다 -_-...


  • 2023-03-30 10:13

    저도 제일 두려운 것은 비슷한 듯 합니다. 열심히 작업하다가 순간 블루스크린이 두둥... ㅠㅠㅠㅠ 심장이 덜컹하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래서 수시로 저장하고 백업상태를 확인하는데 예전에 한번 날려먹은적이 있어서 그럴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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