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번역회사 생존기 9 - PM은 뭐하는 사람인가

안녕하십니까 대원님들, 월급도 짜고 일도 많은 한국 번역회사에 스스로 들어가서 구르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입니다. 살려주새오 퇴근시켜주새오 잉잉징징 외에 다른 소리를 하러 왔습니다.

실미도 입대하고 이제 막 첫 입금을 받고서 기쁨의 깨춤을 추던 꼬꼬마 버녁가 시절, 저는 PM이 뭐하는 양반인지 모르겠으나 엄청 중요한 일을 하느라 무진장 바빠서 귀찮게 했다가는 내 모가지를 날릴 수도 있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같이 일하면서 보니, (위의 내용이 틀린 묘사는 아니지만) 그냥 바쁜 양반이 아니라 퇴근 시간에 일 던져주는 그지같은 고갱님부터 납기일이 만 하루가 지났는데 작업물을 지큼까지 그래와꼬 아페로도 께속 안 주는 버녁가에게까지 친절을 잃지 않는 프로패쇼날한 존재였어요.
아마 회계팀과 영업팀이 따로 없는 쟈근 번역회사라면 직접 영업도 뛰고 회계 처리도 하겠지요...? 궁금하지만 확인을 위해서 쟈근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읍니다ㄷㄷ 지금 삽질로도 충분해요.

사실 저는 대원님들이 PM이 뭐하는 인간일까를 왜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읍니다. PM이 업무 시간에 안 감은 머리로 헤드뱅잉을 하든 루돌프 사슴코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크리스마스까지 일하고 있든 실제로 뭘 하는지는 대원님들이 알빠고 쓰레빠겠습니까. 제일 궁금한 건 그것이겠지요.

"이렇게 하면 PM이 저를 짜를까요?"

좀 극단적인 질문입니다만 제가 버녁회사 입사 전, PM한테 보낼 메일 작성하면서 '요청드립니다'가 나을까 '부탁드립니다'가 나을까를 고민하며 매번 생각하던 질문이 저거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요? 아니라면 제 궁예가 실패했단 거겠지요. 어쩔 수 없지요 :3 하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아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슬쩍 언급했듯이, 버녁회사는 작업자를 DB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DB에 완벽하게 권한을 가지고 관리하고 열람할 수 있는 것은 PM 뿐이고요. LL인 저는 그다지 권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버녁가를 추가할 수도, 없앨 수도, 정지시킬 수도 없고 그냥 열람하고 코멘트를 달 뿐이지요. PM은 위의 권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을인 버녁가는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요.

다행인 것은 PM이 그런 갑이지만 그 한 줌 권력을 본인의 KIBUN에 맞춰 휘두르기엔 너무나도 바쁜 존재라는 것입니다. 혹독한 한국 사회의 답금질(...)로 웬만한 일은 위장약을 입에 털어넣으며 허허허허 웃어 넘기는 성인(聖人)으로 재탄생한 것도 한몫 하지만요. 감정적으로 어지간해서는 PM을 거슬리게 만들 수 없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분들도 있습디다. (그래서 일단은 PM에게 메일을 공손하게 쓰는 것이 조읍니다.)

그러니 우선 감정적인 일로 짜를 일은 없으니 일적으로 쓸만한 버녁가로 인정받아야 쭉 거래를 할 수 있다는건데, 그 조건이란 영미도 대장님이 꾸준히 언급하신 것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은 국영수 위주로 공부한다처럼 너무 당연합니다.

1. 연락이 잘 돼야 한다.

번역가 희망편: 일이 내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 예쁘게 착착 미리 일주일 전에는 예고하고 들어온다.

번역가 절망편: 일이 없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굴뚝으로 뿌려지는 호구와트 입학 안내 편지처럼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데 고갱님은 양심도 없이 빨리빨리 해달라면서 급행 요금도 안 준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절망편이예요. 버녁회사도 같은 일을 겪습니다(...) 일을 묵혀놨다가 일부러 버녁가들 골탕먹으라고 급하게 뿌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니 꼮 비싼것만 훔쳐가는 루팡도 예고는 하고 오는데... 고갱님은 돈 주는 입장이라고 갑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연락했는데 연락이 바로 되는 번역가에게 먼저 일이 돌아갑니다.

Tip: 일을 받았으면 잘 받았다고, 일을 못 받을 것 같으면 못 받을 것 같다고 답장을 합시다. 못할 것 같다는 답장이라도 빨리 해조야 PM이 조와해줌.

2. 납기를 제때 한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2222 1번보다 더 크리티컬한 조건이예요. 연락이 늦다고 코멘트가 달리지는 않지만 납기가 늦으면 코멘트가 달려요. 자주 늦으면 코멘트가 많이 달리다가 조용히 비활성화 되겠지요. 비활성화 한다고 님짤림이라고 귀띔해주지 않고 그냥 일을 받을 수 없는 모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본인도 짤린지 모르는 상황이 되는 무서운 상황이지요. 납기를 제때 합시다. 늦을 것 같으면 미리 말하고요. 그런데 미리 말해도 너무 자주 늦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쳐낼 수 있는 분량을 익히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Tip: 굳이 납기에 땡 맞춰 보낼 필요 없습니다. 프루프리딩까지 끝내고도 시간이 남으면 얼른! 지금! 당장! 보내세요. PM이 조와하면서 기억해줍니다.

3. 역시 퀄리티가 중요하다.

이것도 당연하지만 맞춰주기 힘든... 어떻게든 덜 빻아봅시다 :3 PM은 작업물에 손을 댈 필요가 없을수록 좋아합니다. 일단 저희 DB에는 작업자에 마춤뻡 테스트 돌릴 필요가 1.있음, 2.없음, 3.받고 프루프리딩도 필요함 등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습니다. 시간도 없고 인건비도 가능하면 덜 들어가게 테스트 돌릴 필요 없는 사람이 제일 선호되겠지요.
일정이 바빠서 그 버녁가 외에 대체자가 잘 없을 경우 일단 졈 빻아서 와도 에디터와 프루프리더가 싹싹 갈아서 다듬어 납품해줍니다. 하지만 너무 빻은 나머지 다듬어서 될 수준이 아니라면 빡친 에디터와 프루프리더가 이건 재번역하는 수준이라고 PM에게 읍소하겠지요. 그럼 짤릴 확률이 크게 높아짐.

Tip: 내가 못 하는 분야를 먼저 찾아보고, 영알못이라면 영어 강의를 들읍시다(저는 영미도 대원이라). 번역할 때 맞춤법&오타 체크, 용어집&TM 활용에 신경씁시다. 잦은 오타와 TM 씹어먹기를 PM은 기억하지 못해도 리뷰어/에디터/LL은 기억합니다.

4. 메일 답신은 스레드로
한 프로젝트만 담당하며 새로운 작업이 순차적으로 납품 후 착착 들어온다면 그는 매우 운이 좋은 PM일 것입니다. 하지만 버녁회사도 고갱님도 PM이 한 번에 하나씩만 일을 맡게 두지를 않죠.
그래서 스레드별로 답신하지 않으면 PM은 작업자가 지금 어느 프로젝트의 어느 일을 말하는 것인지 몰라서 혼돈의 카오스를 겪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업자: (스레드에 이어 작성하지 않고 새로운 메일 작성) 안녕? 용어집 수정했으니까 확인해줘.
PM: 구래;;; (어느 프로젝트의 어느 잡의 어느 용어집을 말하는 건지 몰라서 가지고 있는 용어집과 일일이 비교하기 시작)
PM의 위장암을 유발하는 작업자가 되지 맙시다 ^q^... 이것도 결국 대장님의 PM을 귀찮게 하지 맙시다!에 들어가는 내용이겠네요.

게다가 메일 트래킹하기 어려워져서 추후에 번역 문제가 생겼거나 지불 문제가 생겼거나(중요!!!) 할 때 작업자가 문제의 그 메일을 검색해서 찾아다 줘야 하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Tip: 메일 제목을 바꾸지 말고, 한 스레드에서는 그 작업 얘기만 합시다. 아무리 PM이 감정적으로 사람을 짜르지 않는다지만, 사소한 짲응과 불편함이 모여 이 작업자와 일하면 안해도 될 일을 하게 된다고(=귀찮다) 생각할 여지를 주게 됩니다.

랴 넌 당연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글로 쪄왔냐!고 하시겠지만 정말 기본인데 안 지키는 작업자들이 상당수라(역시 바쁜 프로젝트라 대체자가 없어 그런 분들도 그냥 안고 가야 함) 젠틀 리마인더로,, 실미도에서는 기본 장착한 개념이 생각보다 기본 개념은 아닌가본지 다들 다방면으로 빻아서 오는데, 작업자 분들 실미도 강제 입대 시키고 싶읍니다 흑흑

그럼 다음 생존기에서 또 볼 수 있길 바라며 이만 총총...☆
번역가 beyond beyond · 2019-04-12 18:08 · 조회 7297
전체 35

  • 2019-04-12 18:15

    제가 틀린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며 읽었습니다 ㅋㅋㅋ 좋은 정보 감사해요!


    • 2019-04-12 19:32

      실무를 익히며 구르면서 깨달은 거지만 신기하게 대장님이 알려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네요ㅎㅎ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는것


  • 2019-04-12 18:15

    오늘 생존기 너무나 유익하고 재미나네요. 일주일에 한 번씩 읽고 짤리지 않는 버녁가를 목표로 삼겠습니다!


    • 2019-04-12 19:31

      일주일에 한번씩 읽겠다니 황송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읍니다


  • 2019-04-12 18:30

    우와어아아엉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감사합니다. 저는 전화를 너무 빨리 끊은 게 못내 마음에 걸려 다시 확인 전화도 한 인간입니다. (....) 지금까지는 크게 삽 푼 게 없구나 안심도 됩니다 흑흑;


    • 2019-04-12 19:33

      악ㅋㅋㅋㅋㅋ전화를 너무 빨리 끊어섴ㅋㅋ 저도 그 걱정 해본적 있어요. 다음 정보글엔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쪄오려고요


  • 2019-04-12 18:57

    노릇노릇 잘 구운 빠다오징어 씹어먹으면서 정자세로 숙독하였읍니다...읽으면서 나는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없나 조마조마한 마음과 함께ㅎㅎㅎ

    [ '요청드립니다'가 나을까 '부탁드립니다'가 나을까를 고민하며]<-이 부분 진짜 레알 정말 멍공감ㅋㅋㅋㅋㅋ 사실 지금도 하는 부분이고요. 무례하지만 않으면 메일에 꿀 발라 놓은 것보다 번역 퀄리티가 더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메일 너머에 사람이 있다보니 신경을 안 쓸 수 없더라고요ㅋㅋㅋ

    이번 편도 잘 보았읍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소서...!


    • 2019-04-12 19:42

      차근차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퀄이 중요하다지만 pm도 사람이다보니 아무래도 기본 예의 탑재한 사람이 더 마음이 가겠죠? 신경쓰일수밖에 없는것같습니다. 덕담 고맙습니다!


  • 2019-04-12 19:49

    정말정말 ㅎㅎ 몇 번 정독해야 할 글이네요 ^^ 간접 경험으로 지식 많이 쌓아두면 ㅎㅎ 실전가서 다 도움이 되겠지요 ? ㅎㅎ 이상적인 것만 잔뜩 가지고 있네요 ㅋㅋㅋㅋ ㅠㅠ 현실은 ... 번역의 ㅂ 도 못해본 ㅋㅋ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


    • 2019-04-15 11:41

      저도 다시 프리랜서로 복귀했을 때 도움이 될거라고 그렇게 희망을 품어봅니다 허허


  • 2019-04-12 20:21

    완결나면 모여서 비욘드님께 맥주라도 사드립시다 너무 유용해 흑흑


    • 2019-04-15 11:43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 글 쓰면서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놀라벌인


  • 2019-04-12 21:17

    매번 beyond님 글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유용한 고오급 정보 잘 얻어가고 있슴미다!


    • 2019-04-15 11:43

      평생 들을 글재간 칭찬을 실미도에서 다 듣는 것 같네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9-04-12 21:25

    근데 여기서 ,, 번린이 질문 한 개 해도 될까요 ? 메일 스레드가 무엇을 의미하나요 ? 음 업무 이메일을 써본적이 없어서요 ㅠ


    • 2019-04-12 22:03

      지메일에서 메일을 주고받으면 예를 들어 PM이 보낸 메일1-내가 그 메일 읽고 그 창 안에서 답장 버튼을 눌러 쓴 답장1-PM의 답장2-내 답장2... 순으로 쭉 메일 주고받기가 이어지게 되는데 그걸 스레드(타래)라고 해요! 메일 제목은 (예를들어)
      번역가야 일이다
      ㄴRE:번역가야 일이다
      ㄴㄴRE:RE:번역가야 일이다
      이렇게 정해지게 되는데 여기서 제목을 바꿔버리면 스레드가 새로 생깁니다. 그러면 PM이 귀찮아지게 되는 것..


      • 2019-04-13 23:48

        스레드 설명 예시의 제목잌ㅋㅋㅋㅋㅋ


      • 2019-04-15 11:44

        그 스레드가 맞습니다


  • 2019-04-12 23:07

    ^^ 감사합니다 !! 자세한 설명 !


  • 2019-04-12 23:10

    오늘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ㅎㅎ


    • 2019-04-15 11:48

      유익한 글이었다니 다행입니다ㅎㅎ


  • 2019-04-13 06:01

    재미있게 읽었어요 유익한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9-04-15 11:48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읍니다


  • 2019-04-13 06:02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ㅎ


    • 2019-04-15 11:49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 2019-04-13 15:30

    맞춤법 돌릴 필요가 1. 있음 2. 없음 3. 프루프리딩도 필요함으로 등급을 매겨놓는다니 색다른 정보입니다 그려
    맞춤법도 돌릴 필요없고 작업물에 손 댈 필요가 별로 없는 번역가로 인정받고 말갓어요
    영양가 만점의 버녁회사 첩보 감사합니당 비욘드님


    • 2019-04-15 11:44

      퀄리티를 함께 높여봅시닷


  • 2019-04-13 16:17

    진정 궁금했던 부분이 맞습니다!!!! 피가되고 살(은 안되씅면 좋겠지망)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 2019-04-15 11:45

      궁금했던 부분을 설명해드린거라니 다행입니다ㅋㅋ 흔한 설명충이 된건 아닌지 싶었는데


  • 2019-04-13 22:05

    ㅎㅎ알빠고 쓰레빠겠습니까ㅎㅎㅎ 비욘드님 늘 재밌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 2019-04-15 11:45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 2019-04-13 23:49

    정보도 유익한데 드립이 찰져서 눈에 쏙쏙 들어오네요ㅋㅋㅋㅋ PM은 전 직장의 제 업무와 거의 같군요 흑흑 때려치우길 잘했어...


    • 2019-04-15 11:46

      흡사 MD입니다 mo든걸 da해의 줄인말... 저의 소소한 드립에 웃어주다니 고맙읍니다


  • 2019-04-16 12:37

    비욘드님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너무 재밋오요...


    • 2019-04-23 15:29

      이 댓글을 왜 이제봤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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