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번역회사 생존기 10 - 해 지기 전에 퇴근하고 싶어요

안녕하십니까 대원님들, 프로야근러 비욘드입니다.

프로야근러라는 타이틀답게,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할 정도로 바쁜 요즘입니다. 잠깐이지만 칼퇴하곤 했던 때가 그립군요.

요즘의 상태:
고갱님: 다시다시! 좀더 상냥한 데스메탈의 느낌으로!
비욘드: (고갱님 그러다 단명하십니다 소리를 속으로 오조 오억번 하는 중)

요즘은 프로젝트 내에 대규모 업데이트가 있고, 고갱님은 자비없이 안 그래도 타이트한 일정인데(고갱님은 우리를 번역회사가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함) 일에 일을 얹어줘서 1+1은 2도, 창문도 아닌 중노동일 뿐임을 어린 중생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 실미도는 며칠에 한 번,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주말에나 접속하고 있고요 흑흑... 실미도 지박령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댓글 하나 달까말까 합니다. 뭐야 내 타이틀 돌려줘요.

오늘은 그 야근을 유발하는 건들에 대해 잉잉징징하러 왔습니다. 팝콘은 튀기고 계신가요? 영화관에서 벚꽃 팝콘 아직도 파는지 궁금하네요. 그냥 분홍 시럽을 끼얹었을 뿐인데 '벚꽃'이라는 이름 때문에 괜히 이번에는 체리맛이 날까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어 사먹고 싶게 만드는 그 팝콘이요. 그냥 꿈도 희망도 없는 분홍색 버터 캐러멜 팝콘일 뿐이지만요.

계속된 야근으로 피폐해져서 자꾸 아무말이 나오는군요. 계산해보니 이틀간 24시간을 일했더라고요. 리워드로 감기몸살을 얻어 체력과 Sanity 수치 디버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팝콘과 빠다 오징어가 괜히 더 맛있고 대원님들이 프리랜서인게 더욱 자랑스러운 글이 될 것 같네요.

다음은 야근을 유발하는 빡치는 사건들 리스트입니다.

1. 예고 없이 금요일 퇴근 시간에 일 던져주는 고갱님
직딩용 드라마를 보면 항상 나오는 진상 과장 타입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그런 사람을 못 만나봐서 픽션인줄 알았는데(제가 운이 좋은 것인가요?), 진짜로 있더라고요. 그래놓고 자기들은 퇴근합니다. 미쳤습니까 휴먼?
일 던지고 튄 고갱님에게 않이 이게 뭔짓이냐고 따지려고 메신저를 켜보면 오프라인 상태예요. 우리한테 기습 야근을 시키고 지들은 이미 퇴근했단 소리죠.

2. 작업자의 납기 지각
한국 시간 기준 EOB로 보내달라고 한 파일을 자기 나라 기준 EOB로 보내줍니다. 현재 시각 저녁 8시. 그리고 사과는 없습니다. 예? 지난번에 얘기한 에피 아니냐고요? 소재 재탕이면 얼마나 좋겠읍니까만 놀랍게도 지난주에도 그런 일이 또 있었습니다. 사과라도 해라!!!

3. 고갱님이 원문을 개발괴발 써와서 고갱님에게 원문 잘못된 것 맞냐고 하나씩 확인 질문하느라고 일 템포 느려짐
고갱님 나랑 싸우자. 원문 쓰자마자 내부 검수 안하고 그대로 보내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원문이 빻았습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오타 천지에, 띄어쓰기는 왜 두 번이나 하시는 것인가요. 게다가...
고갱님도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인이고... 원문도 한국어인데... 웨,, 저는 이게 이 뜻으로 쓰여졌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지요...?

대원님들도 한 번 원문에서 발췌한 이 문장을 읽고 고갱님의 의중을 맞춰보세요. NDA 때문에 당연히 빻음도만 유지하여 형태를 바꾼 문장입니다.

원문: '등급이 낮은 장비가 있다면 그 장비를 획득할 수 있는 몬스터 처치'

잠깐 스크롤을 멈추고 이게 무슨 뜻일까 유추를 해 보고 스크롤을 계속 내려봅시다.

진짜 생각하셨나요?

진짜로?

고갱님의 의중은:

"등급이 낮은 장비가 있다면 그 장비와 같은 종류이지만(건틀렛 등의 카테고리에 해당), 더 높은 등급의 장비를 얻기 위해 특정 몬스터를 처치하라"

맞추신 분?

저는 처음에 '이게 뭐지, 유저 트롤용 멘트인가' 했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 후줄근 템이 있다면 계속 그런 장비나 끼고 똑같은 장비나 모으면서 던전이나 돌라구~트롤롤로로로롤~~

아무튼 이런 느낌의 원문을 보내오는 고갱님 때문에 미추어버리겠어요. 저렇게 개판으로 원문을 써와놓고, "이 뜻이 아닌데?" "원문 수정해봤어. 이게 더 낫더라." "이런 느낌이 아니야!" 하면서 영어 번역을 부침개마냥 뒤집고 바뀐 영어 원문에 따라 다국어도 뒤집습니다. 뭐 본인들이야 바꿔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지만 저희는 그러면 야근 확정이예요. 왜냐면 영어를 소스로 하는 다국어가 한두개가 아니거든요. 역시 고갱님의 결투신청인데 저희가 눈치가 느려서 무시하고 있는거겠죠? 고갱님을 무시하는 눈치 없는 회사원이 되지 않기 위해, 퇴사할 때 열면 반짝이가 사방으로 튀어나오는 반짝이 폭탄을 보내어 응답해줄까 생각 중입니다.

일하시다가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예전 회사에서 주는 일 받아서 제법 잘 지내는 분들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는데, 정말 그분들이 위너입니다. 저의 롤모델이시다.

4대보험 적용, 공휴일에 쉴 수 있음, 명절 상여금, 유급 휴가, 회사 자체 휴일, 안정적이고 작고 귀여운 월급, 고정적인 근무 시간 등이 회사원의 장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 장점들이 고갱님의 방해 뿌요에 상쇄되어 남는 것은 결국 4대보험과 월급, 명절 상여금 뿐이군요. 고갱님 빠요엔 자제하십쇼. 그리고 이거 농구 아니애오 굳이 버저비트 하지말아달라.

번역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고 위장취업(!)을 하거나 잠깐 일해보는 것은 괜찮지만, 그럴거라면 6개월 안에 도망치는 것을 추천합니다. ? 6개월 정도면 충분히 다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일 좋은건 '안'. 회사에 취업을 '안' 하는 것입니다. ;D

어떠신가요? 오늘따라 팝콘이 바삭바삭하고, 빠다 오징어가 꼬소하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매일 소재가 쏟아지고 있어(마른세수) '네 망했네요(너덜너덜)'글의 소재를 정리해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지 않는 선에서 웃기고 빡치며 조금은 슬픈 에피소드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다음 생존기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만 총총.
번역가 beyond beyond · 2019-04-29 15:04 · 조회 4864
전체 21

  • 2019-04-29 15:18

    으아아아아아아 비욘드님 기다렸어요 (와락) 이틀 동안 24시간이라니 이게 뭔 소린가요. (눈물 좀 훔치고) 저 역시 보통이라면 피엠이 퇴근할 시간인데 드물게 급하게 전화 와서 일 던지고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던데 역시나 고갱님이 갑자기 일을 던져 주셔서 (....) 저는 얘네들 퇴근 안 하냐 무섭게 왜 이래 이랬는데.

    원문 빻음 진짜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번역하다 보면 이게 번역이 아니고 암호 해독한단 느낌이 들 때가 자주 있는데.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이궤 도대체 뭰 소리죠 나도 모르겠다. 배째라 이러고 번역을 질러놓습니다. 가끔 현대 아티스트와 협업해서 뭔가 작품 컨셉을 설명하려고 들면 사람 환장파티하는데 (...) 드물게 한국인 아티스트가 있어서 오! 한국인이야! 관련 인터뷰를 찾아봐야지! 찾았다! 이러고 클릭하니 첫 문장부터가 '제가 이 아이디어를 디벨롭해서...' 이래서 조용히 껐습니다. 아 이 새끼도 지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내 맘대로 소설을 써주마! 리뷰어가 알아서 하겠지! 이런 적도 있습니다. 후. 생각 외로 글 못 쓰는 새끼들 너무 많습니다. 머리 속을 열어 보고 싶어요. 도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한 거니...


    • 2019-05-02 09:11

      저도 번역하다보면 퇴근했을 시간에 일을 보내오는 pm이 있어서 얘네는 해외에서 일하나...? 싶었는데 그냥 야근이었던걸로^q^... 원문 빻음은 참 고질적인 문제군요 개떡같이 빻아와도 찰떡같이 번역해줘야되는데 뭔 말인지 모르겠는 사태..


  • 2019-04-29 16:09

    비욘드님이닷! (폴짝폴짝)
    역시 헬조선의 직장 생활은....
    비욘드님의 생존기를 읽으니 저의 프리한 라이프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저를 헬조선 직장 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신 뮨선생께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프리 생활하면서 느낀 건데, 전 돈을 적게 벌더라도 일을 적게 하고 많이 쉬는 게 좋더이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 인간인 지 깨쳐가는 중.
    프로젝트 하나 끝나고 며칠 푹 쉬고픈데 눈치없이 700딸라짜리 일감 던지는 에이전시가 있길래 그냥 차버리고 냅다 쉬었어요.
    저는 이렇게 돈 욕심이 없는 사람


    • 2019-05-02 09:12

      프리한 라이프 매우 소즁.. 입니다. 잘하셧읍니다 일이 많더라도 그렇게 자체 퇴근을 시켜주새오. 왜냐믄 관절도 근육도 오래 써야 하니까요.ㅠㅠ


  • 2019-04-29 16:22

    울릉도 반건조오징어 씹으며 읽었습니다...!


    • 2019-05-02 09:14

      재밌게 읽어주신 것 같네요! 자체해석해버리기


  • 2019-04-29 17:00

    아.. 이번편도 너모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최종 소비자 몇 번 대해보니 PM님들께 존경이 엄청 쌓이더라고요ㅠㅠㅠㅠ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2019-05-02 09:15

      저도 최종소비자와 직접 소통할 일이 없던 때를 지나 지금은 매일 소통하고 있다보니 정말 pm은 보살이군 싶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9-04-29 21:26

    조용히 기다린 자 조용히 좋아요 누르다..


    • 2019-05-02 09:15

      조용히 좋아하는중


  • 2019-04-30 00:41

    처절한 한국 직장 생존기 잘 읽었습니다ㅠㅠ 상냥한 데스 메탈의 느낌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가요..?;; 재미있게 쓰셨지만 직장인의 애환과 슬픔이 느껴지네요ㅠㅠ 바쁘더라도 몸 챙겨 가며 일하시길..


    • 2019-05-02 09:16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우유 뺀 카페 라떼... 그런 것이지요. 말도 안되는 요구사항을 디밉니다ㅠㅠ 처음 번역 맡기는 건지 본인들의 오더가 왜 잘못됐는지도 몰라요...ㅠㅠ 걱정 감사합니다. 영양제를 삼키며..


  • 2019-04-30 00:47

    읽으니까 번역 회사 직원들이 얼마나 바쁜지 실감나게 실감나네요...! 더욱 더 피엠을 귀찮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19-05-02 09:17

      그렇습니다 피엠을 귀찮게 하지 맙시다...! 일이 갑자기 없을 때도 있습니다만 번역회사는 대개 인력난이라 그런 날이 손에 꼽지요.


  • 2019-04-30 10:42

    비욘드님 시리즈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건강 잘 챙시면서 일하세요 ㅠㅠ


    • 2019-05-02 09:18

      재밌게 읽어주시고 건강 걱정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복싱을 끊어서 피통을 키우고 있어요. 어차피 깎일 체력이라면 피통이라도 키우자는 마음으로ㅋㅋㅋㅋ


  • 2019-04-30 10:52

    상냥한 데스메탈ㅋㅋㅋ
    비욘드 님의 필력이 나날이 더해가는 걸 보니 취업도 뽐뿌가 살짝 오고요?ㅋㅋㅋ 살짝만입니다.
    그럼 프리랜서가 햄볶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며 이력서 쀼리러 가겠읍니다..


    • 2019-05-02 09:19

      아니 이럴수가 재밌게 읽어주시는 건 좋지만 취업은 다메입니다... 프리 생활이 쵝오입니다


  • 2019-04-30 15:05

    저는 사실 샘플 문장을 읽고 이해는 했습니다. 직장 다닐때 많이 당해봤거든요. 상대방 업체 경리 담당자가 말을 저렇게 해서 진짜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어요..... 지랄하면 쳐 삐지고 울면서 조퇴를 하는 바람에(실화)(뒷목)(혈압) 이해가 가니까 더 무섭네요ㅠㅠㅠㅠ 그 고충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으아아아아ㅠㅠㅠㅠㅠㅠ


    • 2019-05-02 09:20

      이해가 가다니 무서운 분... 처음엔 저 문장을 읽고 1. 저건 트롤러 문장인가 2. 그럴리 없으니 같은 장비를 모아 녹여다가 강화를 하란 뜻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둘다 틀렸지요. 자꾸 저렇게 소스를 써오니 너무 답답해요ㅠㅠㅠㅠ


  • 2019-05-10 02:36

    글을 참 재밌게 잘 써주시네요
    비욘드님 건강 챙기세요ㅠㅠ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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