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들만큼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는데요

번역충이 된지 어언 6년… 지난 달 인보이스 합계가 사상 최초로 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기쁘냐 하신다면 당연히 기쁘지만 동시에 두 번 다시 이런 금액이 찍히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도대체 제가 이 금액에 해당하는 일을 무슨 수로 다 해낼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심지어 휴가를 간 상태에서 말이죠.

저는 그냥 인생에 아무 기대가 없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습니까만은 저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일단 가난부터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이 옷도 아니고 벗고싶다고 다 벗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요?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냥 남들 버는 만큼이라도 벌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의점 알바를 병행하며 오직 번역으로만 월 300만 원만 벌어보더라도 바랄 게 없겠다, 하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300만 원은 기본적으로 저한테 할당되어 있는 프로젝트만 다 해도 찍히는 금액이 되는 날이 오더라고요.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합니다. 걷고 있으면 말을 타고 싶고 말을 타면 가마에 앉고 싶고 가마에 앉거들랑 비즈니스 클래스에 눕고 싶은 게 인간의 추하디 추한 본성 아니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00만 원 이상, 심지어 500만 원이라는 대기업 초봉에 준하는 돈을 벌기 시작하니 그때부터는 정말로 더 많이 벌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돈이 많이 생기니까 그걸 쓰고 싶은 마음도 같이 들더라고요.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제가 뭐하러 가난을 벗고 싶었겠습니까? 다 쓰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었겠어요?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 돈 중 상당 금액을 저축을 했습니다. 통장에 몇백만 원씩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고 있으니 저는 전혀 재미가 없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통장에 돈이 쌓이면 재미가 있다고 그러던데 저는 전혀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돈으로 유럽에 여행도 가보고 백화점에 가서 비싼 화장품도 사보고 명품관에 가서 일 년에 수천만 원씩 퍽퍽 써보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더라고요.

가난뱅이 당사자로서 하는 말이니까 가난 비하가 아니라 그냥 저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대로 말하자면 아, 평생 남 눈치나 보던 내가 이제 남이 내 눈치를 보게 만들 수가 있구나 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재미는 여전히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통장에 돈이 없으니 어디 좋은 곳에 가더라도 돈 쓰기가 무서워서(다들 아시겠지만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시급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그 기분은 정말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좋은 물건을 보더라도 좋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식은땀부터 줄줄 흐르는 그 기분은 정말 불쾌했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복지 혜택이 좀 더 잘 되어 있다고 하는데 제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급식비 보조도 못 받았고 수업료 지원도 안해줬습니다. 진짜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던 시절이었죠. 요즘은 학생들이 내신을 버리고 수능으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자퇴를 한다고 하던데 저는 진짜 돈이 없어서 자퇴를 하고 싶었습니다. 당장 수업료 낼 돈도 없는데 언감생심 과외는 커녕 학원이라도 다녀볼 수 있었겠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는 글 쓰는 기술 뿐이라 그걸로 여기저기 백일장 다니며 상금도 뜯어오고 하다못해 경품이라도 받아오며 살았는데 그럼에도 그 돈으로는 제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냥 근근히 자습서 같은 거나 사서 보는 수준이었어요.

아, 인생 비루한 얘기 계속 쓰려니까 너무 비참한데 그냥 이쯤에서 멈춰볼까요.

10대가 비참했으니 20대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알바를 해야 했고, 그 와중에 눈은 높아져서 꼴에 당시로는 별로 인기가 없던 뮤덕질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외부에서 무슨 닉네임을 쓰고 사는 인간쓰레기인지 대강 눈치를 챌 법도 한데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여하간 20대 중반까지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하는 주제에 알바비를 받으면 그 중 간간히 돈을 쪼개서 공연도 보고 비싼 화장품 브랜드에 가서 향수 같은 것도 샀습니다. 당시에는 8만 원 정도 했던 그 향수를 사는 데 얼마나 손이 떨리고 그거 하나 산 걸로 여기저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싶었던지….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게 되고(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돈이 아깝단 생각만 듬) 좋좋소에 취직이라도 해보겠다고 면접을 보러 갔다가 장렬하게 어버버하며 첫 면접을 말아먹었습니다. 그 뒤로는 얼레벌레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번역충으로 전직을 하게 되죠.

최근에 저는 이사를 준비 중입니다. 비싸고 좋은 곳으로는 갈 생각이 없어요. 저는 그동안 프리랜서의 장점이 뭔지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이사를 준비하며 느꼈어요. 아,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여러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역세권 같은 대중교통 접근성이나 퇴근길에 간신히 들러서 장을 볼 수 있는 마트 같은 게 나는 전혀 필요가 없어서 같은 돈을 주더라도 더 넓고 쾌적한 공간을 구할 수가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결혼 생각이 없으니 초품아 같은 옵션도 필요 없으니 더더욱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 부동산에 원하는 물건의 종류를 의뢰하고 간을 보는 중입니다. 그리고 남는 돈으로는 이런저런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사려고 보고 있습니다.

300만 원 짜리 침구 세트를 사고 수건은 호텔 수건을 사야지, 수건을 뽀송하게 쓰려면 건조기도 사야하고 식기는 다니는 브랜드의 셀러 매출도 올려줄 겸 한 300만 원 정도 배정해두고… 하면서 계획을 쭉 짜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내가 부자는 못 됐어도 가난은 좀 벗긴 했구나 하고 말이에요. 신기하죠. 제가 작년부터 월 최소 700만 원 이상을 꾸준히 벌고 웬만큼 돈을 써서는 돈이 부족하단 생각 자체가 안 들다보니 뭘 하더라도 더 이상 돈 생각은 어지간해선 안하게 되는 거예요. 물건 하나 살 때도 시급 계산해가며 벌벌 떨었던 제가 말이에요.

번역으로 그만큼 돈을 벌 수가 있어? 싶을 텐데 저는 되더라고요. 물론 다른 분들도 저보다 더 많이 버는 분들 계실 것이라 여기서 아 나 이만큼 잘났어~ 이럴 생각은 전혀 없는데 그냥 저 같은 지잡대 쩌리 인간도 먹고사는 수준을 넘어 가난을 벗어나는 경험을 해보니까 괜히 좀 뭉클한… 꼴값을 떨게 되더라고요.

이상하죠. 저는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돈이 술술 굴러 들어오는 인생도 아니고(그런 건 연금복권 당첨자가 아닌 이상 존재할 수 없음) 여전히 저는 오늘도 일을 해야하고 내일도 일을 해야하며 앞으로도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날 갑자기 제 자리의 책상이 사라지고 ‘퇴직금 잘 챙겨드릴테니 퇴사하시죠’ 소리 듣고 울면서 프랜차이즈 배달 업체 가맹 문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에 저는 만족합니다. 남들은 웬만해선 직장생활하며 통장에 한 번에 넣어보기 힘든 돈을 매 달 따박따박 꽂아보는 경험도 해보고, 그나마 젊을 때 그렇게 번 돈으로 남 눈치 안 보고 여행도 다녀보고 비싼 물건도 사보고 하는 삶을 살아볼 수 있기라도 해서 저는 정말로 만족해요.

인생이라는 건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대 중반의 저한테 너는 30대 초반이 되면 돈을 아무리 써도 통장이 마르지 않을 만큼의 돈을 벌 수 있게 될 거야, 라고 했다면 그걸 믿을 수가 있었겠어요? 대기업은 커녕 좋좋소에서 조차 취직할 능력이 못 되던 제가 말이에요.

당장 책상 옆에는 못해도 이천만 원 이상의 화장품과 향수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등 뒤에 옷장은 1억 이상의 옷과 가방들이 이리저리 처박혀 있는 삶을 살아볼 생각이나 제가 해봤겠냐고요.

얼마 전에 집에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생활비 지금처럼 계속 줄 수 있냐고. 뭐 그렇게 큰 금액도 아니고(백 단위이긴 한데 진짜로 큰 돈은 아님) 어차피 일종의 노후자금 성격으로 매 달 현금흐름 일부라도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으로 보내는 돈이라 그냥 지금처럼 보내줄 거고 물가 오르면 거기 맞춰서 올려줄 거라고 했고 관리비도 여전히 하던대로 제 카드로 자동이체가 되게 뒀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인데 제가 그걸 다 감당해주겠다고 하니까 가족들이 되게 놀라더라고요. 제가 얼마를 버는지 모르니까 하는 반응인데… 여하간 제 입장에선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기분도 내고, 저 하고 싶은 건 나름대로 다 하고 다니며 살다보니 그냥 문득 이런 글이라도 하나 쓰고 싶었습니다.

뭔가를 많이 준비한다고 해서 안될 게 되는 건 아니고, 그냥 별 거 없고 나 같은 게 무슨… 싶은 사람도 또 되려거든 얼마든지 되더라고요. 제가 오역도 없고 완벽한 번역을 하는 뛰어난 번역가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먹고 사는데 여러분도 용기 잃지 마시라고 한 번 써봅니다.
ABC K K · 2024-09-04 23:49 · 조회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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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21:59

    동기부여가 많이 되네요.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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