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솔직하게 까보는 4년차의 마감 라이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들, 대장님의 지도를 따라 산업번역에 몸담은지 어언....4년차에 접어든(네, 만 3년이 얼마 전에 지났습니다) 화석 인사드립니다(사실 이 글은 메모장으로 작성하고 있었는데요, 업로드 시점에 5년차 대원님이 후기를 쓰셔서 화석이란 표현은 부적절한 것이 되었네요ㅋㅋ).
제가 아직까지 후기를 쓴 적은 없었으니, 이벤트에도 참여할 겸 겸사겸사 썰이나 좀 풀어볼까 합니다.

선생님들, 쿠팡 로켓배송(또는 비슷한 유형의 빠른배송 서비스)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드물지 않겠습니까? 번역회사도 그렇지 않을까요? 한 번역가가 최소한의 영어는 할 줄 알아서, 리뷰를 맡기면 쓸만한 결과(=클라이언트가 클레임을 걸지 않을 결과)가 나와요. 최소한의 상품성은 갖춘 거죠. 그런데 마감을 잘 지켜요. 급하고 자잘한 일을 퇴근 전에 부탁하면 바로 해결해 주거나 다음 날 출근할 때 받아볼 수 있어요. 클라이언트가 졸라 빡세게 수정요청을 해 와서 머리가 아픈데(심지어 수정 요청이 한국어로 되어 있고) 번역가가 알아서 한국어 코멘트를 번역한 다음 영어로 설명도 해 줘요. 그거...엄청나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두들기면 결과가 나오는 도깨비방망이가 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 편리함 때문에라도 절대 번역회사는 이 번역가를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4년 내내 이 마인드로 산업번역 시장에서 버텨왔습니다. 효과요? 두말할 필요가 없죠:) 핫하!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력이 아니겠어요?

자, 그러면 제 일과표부터 까 보겠읍니다.

1) 12시~1시: 일어납니다. 이불 속에서 이메일을 확인합니다. 미국 동부에서 퇴근 전에 일을 보내 놓은 걸 확인하고는 욕하면서(또는 울면서) 에이전시 포털에 접속해서 일감을 수락합니다. 예전에는 미리미리 시간 되냐고 물어보더니 이제는 1k(단어 수, 번역 기준) 정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던지고 봅니다(그리고 저는 그걸 또 받습니다 ㅇ<-<). 일이 안 와 있으면 좋아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에 시간을 대충 분배합니다.

2) 아침(점심): 대충 2시쯤 커피를 곁들인 식사를 합니다. 일이 너무 많지 않다면 3시까지는 적당히 놉니다. 일이 많으면 아침식사를 마시고 바로 일을 시작합니다.

3) 3~6시: 해야 하는 일감을 쳐냅니다. 보통 영국 시간으로 오전 9시~10시 마감인 자잘한 일감을 해치우는데, 왠만하면 2k를 넘지 않게 전날 조절해 둡니다. 이메일이 대체로 조용한 시간대라 평온한 편입니다. 여전히 졸리기 때문에 커피를 한 잔 더 마셔가며 일합니다.

4) 6시~9시: 저녁 식사를 합니다. 체력과 의욕이 있다면 요리를 합니다. 없으면 시킵니다. 번역 에이전시에서 언제 연락이 올 지 모르므로 휴대폰 알림을 상시 체크하고, 쿼리 요청이나 번역 의뢰가 오는 경우 바로 처리합니다. 이 시간대에는 아무리 늦어도 이메일 답장 텀이 10분을 넘지 않도록 합니다. 적당히 오며가며 놀고요(...) 아홉 시까지는 게으르게 퍼져 있거나 쌓인 집안일을 합니다.

5) 9시~12시(또는 1시): 번역을 합니다. 번역이 없으면 또다른 직업인 과외 준비를 합니다(과외는 주말로 몰았습니다). 틈틈히 들어오는 자잘한 일감을 처리하거나 의뢰를 받습니다. 이 시간대에는 이메일이 거의 채팅 속도로 오가고요... 머리가 가장 빠릿하게 돌아가는 때이기도 해서 가장 효율이 좋습니다. 커피는 더 마시면 자는 데 문제가 발생하므로 마시지 않습니다.

6) 1시~: 야식을 먹습니다. 급한 이메일 문의가 오면 여전히 답변은 하지만(납기까지 만 하루 이상이 걸리는 의뢰가 들어오는 일이 많아서) 왠만해서는 휴대폰 답장으로 때웁니다. 4시에 자기 전까지 신나게 놉니다.

생각보다는 괜찮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게 다 지켜졌으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쓰지는 않았겠죠. 저건 제가 '날 죽일 게 아니면 휴가를 가게 해달라'라고 외치며 열흘간 DOMANG 한 다음 첫 3일 정도만 해당되는 일정입니다. 저렇게 행복한 3일이 지나면 어떻게 되냐고요....? 1~6번 시간대가 번갈아가면서 '마감모드 ON'(대충 마감이 최우선 상태가 된다는 뜻) 상태로 변경됩니다ㅇ<-< 대충 아래처럼 요약이 가능하겠네요.

휴가 후 3일: 행복한 일상
~10일: 1~6번 중 1~3가지가 마감모드로 변경됩니다. 그냥저냥 나쁘지 않습니다.
그 후 2~4주: 1~6번 중 4가지 이상 마감모드로 변경(물리적으로 시간이 안 된다는 소리를 하면서 열심히 거절하지만... 더보기) 그리고 이 시점에서 다시 도망할 계획을 세우고 다음주(또는 다다음주)부터 쉰다고 열심히 말하고 다닙니다.
휴가 직전 1~2주: 휴가만 보고 꾸역꾸역 버팁니다.
휴가: DOMANG을 외치고 퍼집니다.
...주말 일정을 빼 놓은 이유는, 최대 3k정도(반복 제외)만 받구 다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제발 이 지옥에서 절 꺼내줬음 싶고, 짐을 좀 덜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바쁠 때(영국 시간으로 9시-15시 사이), A회사 쿼리 답변하는 5분 동안 B회사에서는 번역을 의뢰하는 이메일이, C회사에서는 일정을 물어보는 이메일이, A회사에서 했던 다른 프로젝트 관련 쿼리가 또 오고, 정신없이 이메일을 쓰다가 아까 도착했어야 하는 리뷰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울면서 PM에게 번역가에게 연락 좀 해달라고 하죠. 그리고 이렇게 들어오는 일을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저 지금 몇주째 주말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면서 거절하고 그래요. 그거 끝나면 받아놓은 거 번역해야죠...... 저는 번역가니까ㅇ<-<

약간 사람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할까.....싶지만 저는 글렀어요. 이미 익숙해져 버렸구요... 계속 생각하면 정신건강에 안 좋으니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쳐내는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
처음에는 보수적으로 2.5k(단어 수, 반복 포함)를 작업량으로 잡았습니다. 4년차인 지금은 되도록이면 반복 제외 3k 정도로 잡습니다. 여전히 약간 보수적으로 잡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으나, 이 정도가 딱 적당해요. 트라도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요ㅋㅋ트라도스 사랑해요 트라도스 최고 ㅇㅅㅇ)/

언제부터 일감이 많아졌나?
유의미한 수입은 3개월차에 얻을 수 있었고, 안정적인 수입은 10개월차부터 가능했어요. 꾸준히 여러 에이전시에 지원하고 테스트를 봤고, 자잘한 일감으로 이력을 쌓은 다음(아마도 6개월차까지의 이력으로) 지원한 에이전시에서 끊임없이 일감을 주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왔네요.

생활에 만족하는가?
......(말이 없다 죽은 것 같다)......수입은 대만족합니다......만, 사실은 좀 더 놀고 싶습니다. 그래도 첫해만큼 자기 체력과 집중력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하지는 않고요, 힘들면 휴가를 가져가며 버틸 수는 있게 되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ㅋㅋ - 캣툴 활용 능력이 향상되고, 번역 자체도 조금 늘었기 때문에 시간당 생산력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수입은 원하는 수치에 도달했으므로, 이제부터는 휴식시간을 늘리는 것이 주 과제가 되겠습니다(가능할까?).

 

선생님들, 개인차는 물론 있겠습니다만 산업번역가로 자리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2017년 여름에 실미도 뗏목에 올라탄 후 2018년 말까지 시장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산업번역 준비를 했던 건 아니고, 고시원에서 밥 벌어먹고 사느라(...) 그랬어요. 공인 영어 성적은 없고, 그렇다고 각잡고 영어공부를 했던 시기가 긴 것도 아닙니다. 현재는 전문분야가 의학으로 있지만(학부 전공이 생물학입니다), 사실 진입할 때만 해도 전공에 학을 뗀 상태였기 때문에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CAT툴 다루는 법은... 교재조차 없어서 대장님 블로그 글을 한줄한줄 짚어가며(그리고 트라도스 버튼을 하나하나 클릭해 가면서) 공부했고요, 실제로 번역일을 받기 시작한 후 반년간은 프로젝트 만들고, TM/TB 제작해서 넣고, Ctrl+Enter만 누를 줄 알았습니다. 이력서 첨삭도 없었어요(검사만 한 번 받았습니다). 그래도 일을 받을 수 있었고(하지만 이력서 첨삭은 필수적으로 받으십시오), 빠른 응대와 피드백으로(정말로 믿을 구석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후속 일감을 받아가면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죠.

시스템이 탄탄히 갖춰진 지금은 좀 더 빠르게 자리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게, (제대로 된)사람이 항상 부족해요. 일단 저부터가 제 거래처에 사람 좀 집어넣고 싶고요... 한산번의 커리큘럼대로 차근차근 기초를 쌓으신 다음, 너무 겁내지 마시고 달려들어 보세요.

어서 오세요 - 일감은 널렸고, 손은 항상 부족한 동네에... 생각보다 별 것 아니랍니다.

 

*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들의 많은 수입을 기원하겠습니다.
번역가 chatte(람주) chatte(람주) · 2022-04-05 15:43 · 조회 2029
전체 4

  • 2022-04-05 17:16

    넘나 멋지신 것입니다


  • 2022-04-06 09:10

    휴가... 저도 선생님 쯤 연차가 되면 휴가를 외치며 도망각을 세울 수 있겠죠? 지금은 휴가고 뭐고 주말 없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본주의의 노예... 선생님을 본받아 언젠가 꼭 휴가각을 세워보도록 하겠읍니다


  • 2022-04-06 12:25

    진짜 부지런하시네요... 학교다닌단 핑계로 트라도스만 몇번 눌러보고 영어공부만 약간 끄적대고 말았는데 이글읽고나니 학기끝나기전까진 이력서 써야겠단 결심이(지킬수있을진 모르겠다만)


  • 2022-04-08 13:38

    저도 거래하는 에이전시에 인재님을 모시고 싶읍니다...람주님 일과표가 저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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