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회사 진짜 발만 담갔다 뺀 후기(매우 김)

안녕하세요, 대원님들?

포럼에는 가입 후 처음 글을 올립니다.

저도 포럼의 활성화를 위해, 조금이나마 제 경험을 공유드리고자 아이폰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가입 후 1년쯤 지난 후에야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력서와 샘플을 봐주시느라 갈린 사장님의 멘탈을 생각하니 죄송하네요. 저는 staff가 집합명사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력서를 무한 반려당한 스태프 빌런입니다.)

하루 10개는 꼭 돌렸던 것 같아요. 프로즈 알림, 링크드인도 놓치지 않고요.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내 취업사이트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러다가 돈이 궁해 덜컥 한 국내 번역회사에 단기 입사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사장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회사는 늘 "연락이 잘 되고, 납기를 지키며, 오역과 누락이 없는" 번역가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2. 2주만에 퇴사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었네요.)

1-1.

회사 내부에도 번역가와 리뷰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사에 들어오는 모든 일을 쳐낼 수는 없습니다. 회사에는 호떡도 많이 들어오지만(주로 하청의 하청입니다;) 정말 몇 만, 몇십 만 단위의 일도 많이 들어옵니다. 필연적으로 외부 번역가가 필요한데요.

이 때, 회사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번역 일감을 던져줄까요?

당연히 회사마다 1순위, 2순위로 연락하는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들은 회사와 이전에도 일한 경력이 있으며(평판 쌓는 게 왜 중요한지 알겠더군요.) 일을 잘 합니다. 이 때 일 잘한다는 뜻은 스타일가이드도 잘 지키고 오역 누락이 없어서 PM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M은 이런 번역가를 선호하기에 이들에게 먼저 연락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업무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저희 같은 신입 번역가에게도 일이 주어지겠죠. 그렇다면 어떤 신입 번역가가 PM 입장에서 좋을까요?

답은 뻔합니다. 답장 빠르고 납기 안 늦고 오역 누락 없는 번역가입니다. 왜냐하면 PM을 귀찮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클라이언트의 항의를 덜 받으니까요.)

저는 번역회사가 실제로 돌아가는 것을 현장에서 보고 이 사실을 뼈에 새겼습니다. 글로 읽는 것과 실제로 인식하는 것은 천지차이더군요.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 저 세 가지입니다. 업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아 나는 정말 답장도 빨리 하고 납품도 제때 하고 오역 누락도 내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번역가 평판 관리(?) 파일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와... 정말 존재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실제로 회사는 번역가 리소스 파일을 만들어 번역가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를 남깁니다. 납품 직전 포기했다는 어느 번역가의 이름에 빨간줄이 쳐져있던 게 잊히지 않습니다. 평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본은 "정말로" 1. 연락 2. 납품기한 지키기 3. 오역 누락 없음 이었습니다. 파일 열 줄 아는 건 당연하고요.

1-2.

캣툴은 필수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캣툴은 필수입니다. 저는 통대, 영문학과, 석사 그 어느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통대, 영문학과 나온 사람, 석사 딴 사람들 사이에서 일했습니다. 일개 문과인데 왜 저 사람들 두고 저를 뽑았을까요?

면접 때가 떠오릅니다. 국문 이력서에 따르면 저는 트라도스, 메모큐, 멤소스, 엑스벤치, 워드패스트를 쓸 수 있습니다. 담당자님이 이 줄을 보시더니 이런 건 어떻게 배웠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 때 하신 말이 아직도 떠올라요. "웬만한 통대 출신 분들보다 준비가 되어있네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입사 후에도 들은 말이 있습니다. 캣툴을 쓸 줄 아는 번역가가 별로 없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한산번 대원님들, 그리고 프로즈 닷컴의 수두룩 빽빽한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현재 적어도 국내 번역회사의 인식은 그러합니다. 캣툴은 필수입니다. 그 중에서도 트라도스는 필수입니다. 제 사수분께서 제가 트라도스를 할 줄 안다고 했더니 야호! 하고 환호성을 지르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그러나 실화입니다. 회사는 최소한 트라도스를 다룰 줄 알며, 다양한 캣툴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매우매우매우 좋아합니다.

1-3. 번역투는 정말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이 회사 테스트 봤을 때, 문장을 구 단위로 쪼개서 오역 누락 대조하고 대충 말이 되게 수정을 하는 방식으로만 작업했습니다. 직역해서 손 좀 본 게 다입니다. 그런데 테스트 피드백에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라는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이 또한 의문이지만... 정말로 번역투는 상관이 없습니다... 말이 되게끔 수정만 해주셔도 됩니다...

2. 가지 마세요.

국내 번역회사 가지 마세요. 내근직으로 일하지 마시고 프리랜서면 단가 협상 잘 하시길 바랍니다.

한국 번역회사 역시 한국 회사의 좆같음(혈연 지연 학연, 실적 압박 어쩌구, 조직 문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입니다. 업무도 이렇게 뚝딱거려서 회사가 굴러가나??? 싶을 정도로 개판입니다.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보통 상사가 이상한 업무를 주면 관리직은 외면하고 말단이 갈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회사가 굴러가면 차라리 내가 차리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여기다 나의 빻음을 더하면 고통스러워서 손가락을 자르고 싶습니다. (지원 번역분야 상관없이 업무를 던져주니 전문분야가 아닌 분야를 만나면 그냥 뒤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손으로 사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가지 마세요. 저는 당장 생존비가 궁해서 덜컥 수락했지만 차라리 맥도날드 알바를 하는 게 낫습니다. 사장님께서 가지 말라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3. 결론

그래도 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사장님이 염불을 외듯 말씀하시는 "파일 열 줄 알며, 오역과 누락이 없고, 답장이 빠르며, 납기를 지키는" 번역가가 "실제로" 부족하다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저 조건을 충족하는 즉시 나의 가치도 올라간다는 뜻이겠죠. 저 조건은 지키기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역 누락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연습하면 되니까요. 천국으로 가는 황금열쇠라도 쥔 양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여러분 진짜입니다. 진짜로... 진짜로 저게 중요합니다. (혼또니셉션) 아직 감이 안 잡혀서 저 말에 의구심이 든다면 저처럼 단기로 취직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익힌 감각은 글보다 오래 가니까요.

농담입니다. 가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집에 계세요. 그리고 교재를 보세요... 집 안뜰에 쌀이 자라는데 굳이 맘모스 잡겠다고 사냥 나가는 꼴입니다.

2주라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회사 생활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정병이 있고, 최근 심리상담을 종결했는데, 다시 연락드릴 뻔했습니다. 뒤질 것 같아서요.

그에 비해 교재 n회독, 추천 책 n회독, 이력서 첨삭받기 등은 누워서 숨쉬기입니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을 차근차근 따라오시다보면, 프리랜서 번역가로 언젠가 1인분을 하는 날이 오겠지요. 저는 그 희망을... 번역회사에서 굳이 구르면서 보았습니다.

주말을 지내고 나면 영락없이 생존비를 위해 알바몬을 뒤적여야 할 것입니다. 이력서도 돌리고 공부도 하고요. 하지만 차라리 알바를 하며 연명할 망정 프리랜서가 낫다는 것을 지난 2주간의 근무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저도 큰 그림을 그리며 돈을 모아 나오고 싶었지만 참을성이 없고 개빡돌아서(ㅋㅋㅋㅋ)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푸진 푸념글이 됐네요. 혹시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정성이 성립될까봐 쫄아서 닉네임도 바꾸고ㅋㅋㅋㅋㅋ 썼는데 뭐... 이렇게 길게 얘기하게 됐네요.

모두들 평안한 주말 보내시고, 통장에 현금이 두둑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ABC 선인장 선인장 · 2021-03-05 21:23 · Views 7252
Total Reply 7

  • 2021-03-05 22:54

    현장에서 몸소 굴러보신 후기를 그냥 읽어도 되나... 뭐라도 드려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 2021-03-05 23:33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푹 쉬고 재충전하시고 화이팅하시기 바랍니다~


  • 2021-03-06 15:53

    너무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고생 많으셨네요 프리랜서로도 금방 자리 잡으실 거 같아요! ???


  • 2021-03-06 19:53

    글 감사해요. 뭔가 아는 언니 만나서 수다떠는 느낌으로 읽었어요 ^^ 고생하셨습니다!!


  • 2021-03-07 14:36

    감사합니다..! 저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집 안뜰에 쌀이 자라는데 굳이 맘모스 잡겠다고 사냥 나가는 꼴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유도 찰떡이네요.. ㅠㅠ 한국산업번역교육 재개 신청한지 이제 3개월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겁이 나서 못 건드리고 있는데..용기내서 저도 이력서 작성하고 돌리고 그래야겠습니다 ...


  • 2021-03-12 08:14

    와우 선인장 선생님... 글만 봐도 고생하신 게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집 안뜰에 쌀이 자라는데 굳이 맘모스 잡겠다고 사냥 나가는 꼴입니다."라는 문구에 더더욱 집에서 존버하며
    대장님의 바이블, 대장님이 개척하신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 2021-03-12 17:2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전체게시글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