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하면서 가끔 겪는 일...

오래 일해온 어느 게임 현지화 회사에서 게임 하나의 현지화 파일을 던져주면서 2시간 동안 보고 번역의 수준에 대한 리뷰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번역을 고칠 필요는 없고 그냥 수준이 어떤지 얘기해달라,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경우 구체적인 예문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여러 언어로 된 엑셀 파일이라 여는 데만도 한참 걸렸습니다. 남편이 자기가 기다리는 게임 출시되면 지금 자기 컴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며 은근히 업그레이드하자는데 저도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 같군요.

 

드디어 파일이 열렸습니다. 일단 우선적으로 봐달라는 탭에 들어가서 한국어 열을 복사해 워드에 붙였습니다. (엑셀 안에서 열 너비 바꾸고 그러면 또 한참 기다릴 것 같아서 이렇게 봅니다. 맞춤법 검사기도 돌릴 겸...) 그러고 나서 보니...

 

번역기 돌렸나 싶게 조사가 없거나 띄어쓰기가 이상하고 말투가 부자연스러우며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비슷하게 예문을 구성하자면 “Hi! I need help with this quest. Would you join me?”라는 대사를 “안녕하시오?저는 이 위업 도 움 요청 한다.당신 은 나를 참여 할래요?” 이런 식이랄까요.

 

경악해서 다른 탭도 들어가 봅니다. 다 이상합니다. 아이템이나 이벤트 이름 같은 문구도 해괴합니다. Pumpkin Spice는 ‘박 양념’이라거나, Tree with fruits는 ‘과 일무’처럼 뭔가 글자가 빠진 듯한 게 많습니다. 성경에서나 볼 법한 옛스러운 표현도 있습니다. 고유명사도 Zeus라면 ‘치어스’라는 식으로 이상하게 써놨습니다.

중간중간에 forgive를 forget으로 착각하는 식의 실수도 보이는 거 보면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 같기도 하지만, 번역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정말 뇌가 있는 사람이 쓴 게 맞나 싶기도 합니다. 문맥상 mine이 광산이 분명한데 지뢰라고 했다거나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PM에게 15분만 봤는데 이 정도니 더 볼 필요 없는 것 같다고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건 인간이 재번역해야 한다고 각종 예문을 들면서요.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게임, 이미 다른 데서 번역 받은 걸 아마 이 회사에 고칠 필요 있겠냐고 견적 내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같은 개발사의 다른 게임을 그렇게 한 적이 있어서 지금 그 게임은 업데이트될 때마다 거의 제가 맡습니다. 그 게임도 처음에 봤을 때 상태가 많이 한심했어요.

아니면 진짜로 기계 번역을 해놓고는 쓸 만하냐고 물은 걸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언어도 그런지 살펴보진 않았지만, 언어에 따라 그나마 할만 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그동안 번역해온 게임 중에는 초기에만 사람을 쓰고 그 뒤에 업데이트는 번역기를 써서 엉망인 걸 본 적이 종종 있습니다. 한 회사는 처음에 고유명사를 그대로 발음으로 표기하지 말고 해당 언어에 맞게 현지화해달라고 (Brainy Smurf를 브레이니 스머프라고 안 하고 똘똘이 스머프라고 하는 식) 해서 정성스럽게 그렇게 해줬는데, 나중에 업데이트 부분을 보니까 다 그냥 발음대로 써놨더군요.

이 게임을 검색해보니까 진짜 이미 나와있는 게임이더군요. 일단 PM이 뭐라고 하나 기다려 보고 좀 더 문제점을 정리해서 보내줘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왕 말 나온 김에, 게임 번역하면서 또 흔히 볼 수 있는 꼼수 하나는 알맹이는 똑같은데 껍질이 다른 게임(플레이 방식은 같은데 하나는 중세 배경이고 하나는 우주가 배경이라거나) 여러 개 내놓은 회사에서 게임 하나를 일단 현지화한 후, 각 스트링에 대응되는 다른 게임 스트링에 그 번역문을 집어넣고는 번역 대신 프루프리딩 작업해달라고 주는 것입니다. “Craft 10 laser cannons”에 ‘투석기 10대 만들기’라고 되어있으면 ‘투석기’를 일괄적으로 ‘레이저포’로 바꾸는 식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항상 맞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영어는 “Locate the abandoned spacecraft and look for salvageable parts”라고 되어 있는데 한국어는 ‘이웃 마을에 구호물자 요청하기’라고 되어 있으면 새로 번역해야죠. 그래서 이 짓 자주 하는 게임개발사가 클라이언트인 프루프리딩 일감 들어오면 맨 먼저 이게 정말 프루프리딩의 영역인지 아닌지부터 체크하고 PM과 협상합니다. 제가 미처 확인 안 해도 다른 언어 번역자들이 항의해서 번역으로 바꿔주기도 하고요.

 

아무튼, 두 시간 일할 거 안 하게 되어서 여기에 썰 풀러 왔습니다. 게임 번역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 도움이 될까 하여...
Semilla Semilla · 2020-01-28 17:09 · Views 7783
Total Reply 4

  • 2020-01-28 17:24

    와 썰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간접 경험치 올리고 갑니다 🙂


  • 2020-01-28 18:02

    정성스럽게 써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 2020-01-28 19:18

    앗, 그런 경우도 있군요. 사람의 손길 + 기계 번역의 환장의 콜라보가 아닐지 조심스럽게 예측해봅니다(..)
    프루프리딩 일감이 들어오면 미리 훑어보고 이것이 프루프리딩의 영역인지 아닌지부터 체크한 다음 PM과 협상한다는 건 정말 꿀팁이네요!
    좋은 정보 공유 감사드리며, Semilla님 덕분에 많이 배워갑니다: )


  • 2020-01-31 04:41

    Semilla님의 글은 이전부터 열심히 챙겨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 많이 올려주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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